세 명의 작가, 하나의 사물
사물이 깃든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기

아침달에서 소설․에세이 앤솔러지 ‘사물들’을 처음 선보인다. ‘사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주목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물을 하나 선정하고, 세 명의 작가가 그에 관한 글을 풀어내는 앤솔러지 시리즈이다.
첫 번째 사물은 ‘랜드마크’. 박서련, 한유주, 한정현 세 명의 소설가가 함께했다. 세 작가의 랜드마크에 대한 사유가 담긴 소설과 에세이가 독자들을 찾는다. 가상과 현실, 이곳과 저곳, 그리고 어제와 오늘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지금 펼쳐진다.

공간을 상징하는 거대한 사물,
랜드마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사물은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사물인 사람은 여러 다른 사물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사물 중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공통으로 의미 있게 감각하는 사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그 사물에 얽힌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 기억은 특정 시대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경험일 수도 있고, 보편적인 생활에 가까운 경험일 수도, 또는 지극히 개인적이라 특별하거나 사소한 경험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사물을 특별한 것으로 감각하는 일이, 그 사물에 우리의 기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 사물에 얽힌 기억을 꺼내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랜드마크는 어떤 지역을 대표하는 지형이나 시설물, 혹은 역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나 발견, 발명품 등을 이르는 말이다. 탐험가나 여행자 등이 특정 지역을 돌아다닐 때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쓰였다. 사물로서의 랜드마크는 어떤 건물이나 조형물이 될 수도 있고, 작은 책 한 권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랜드마크를 통해 그 공간을, 그것이 포함된 다른 사물을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으로 인지한다.
‘상트 이즈 블러바드 모터 인’이라는 모텔을 통해 붕괴되는 가상을 사유하는 박서련의 이야기,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로마까지, 여러 공간과 사물과 언어 사이를 주유하는 한유주의 화자, 그리고 무너지고 사라짐으로써 상징적인 집단적 상흔으로 남은 “그 백화점”에 관한 한정현의 기억을 함께 살펴보자. 그들이 바라본 랜드마크를 통해 우리는 이전과 달라진 기억의 공간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신적인 높이에서 조감된다는 것

박서련의 소설 「BLVD」의 화자는 게임 속 캐릭터다. 그는 자신이 가상 세계의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따라서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는 심지어 게임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시점에서 곧장 떠오르는 의문은 이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유의지를 가진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저 높은 곳에 있는 신의 눈으로 보자면 그와 우리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의 이야기는 ‘상트 이즈 블러바드 모터 인’이라는 모텔을 무대로 전개된다. 죽어도 그저 진행 상황을 잃은 채 세이브 존으로 돌아갈 뿐인 그는, 죽은 뒤 ‘귀환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어난 사람들, 사람이었던 좀비들을 상대하며 모텔을 탐색한다. 그러던 중 거기서 특이점이라 할 만한 인물과 마주치며 상황은 급변하게 되는데‥‥‥. 소설 뒤에 이어지는 랜드마크에 관한 단상 또한 눈여겨보길 바란다.

곧 폭발할 듯한 장소들

한유주의 소설은 여행자의 시선으로 “복수들”의 세계를 주유한다. 브루클린 브리지, 맨해튼, 뉴욕, 로마, 광장과 상점, 세계 도시들의 지하철과 여러 나라의 사람들, 언어들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여러 언어 사이를 수많은 장소와 사물과 언어 들 사이를 이동하며, 여행자가 중독되어 있을 낯선 감각 속에서 한유주의 화자는 아무 일도 없는 세계를 그린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 세계는 어쩐지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그리고 암시처럼 드러나는 여러 풍경들을 통해, 무엇보다 쉬지 않고 이동하는 그의 문장을 통해 그의 소설은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 같은 긴장감을 던진다. 이 긴장감은 지금 우리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곧 닥칠 듯한 큰 위기의 징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소설 「6월들」에서 익숙함과 기묘함, 보편적 경험의 단면이 문장을 통해 부조리로 드러나는 순간들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재난의 기억을 넘어, 지금 여기에 함께

한정현 소설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은 화자 김강과 그의 이모 박두자 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박두자 씨는 죽기 전에 코타르 증후군이라는 희귀 질병을 앓는다. 그로 인해 자신의 조카인 김강을 비롯한 생전의 기억을 다수 잃은 채,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상태가 되기 전 그녀는 여성노동 생존자 구술 복원이라는 업적을 남긴 연구자였다. 김강은 기억을 잃은 이모에게 ‘자영(자칭 영혼)’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백화점에서 일하던 이모의 삶에 감춰져 있던 기억에 접근해 나간다. 이어지는 에세이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한정현은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미 사라진 공간을 기억 속에 다시 세운다. 자영 씨의 기억을 통해, 또한 현재를 사는 김강의 목소리를 통해, 과거와 오늘을 지나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발걸음들을 함께 살펴주기를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