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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같은 영원 속에서 산다고 상상하는 것은 아름답다”

책은 한 권의 귀한 타인이다
섬세한 인문주의자의 책-사람 읽기

인문출판사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의 신작 산문 『살아가는 책』이 출간되었다. 출판과 편집에 대한 고민을 풍부한 경험으로 써 내려간 『읽는 직업』 이후 3년 만이다. 작가와 독자를 잇는 매개로서의 편집자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자는 『살아가는 책』에서도 중간자로서의 감각을 여실히 발휘해낸다. 책과 현실을 부드럽게 연결 짓고 확장하는 방식의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에서 에메렌츠라는 인물은 실제로 저자의 집안 살림을 엄격한 태도로 돌보아준 서씨 아주머니와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에서 언급되는 방황과 탐색의 여정은 저자와 동명인 친구의 자유로운 삶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책과 현실이 맞물리며 읽는 경험이 확대되는 순간을 저자는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하여 글로 적는다.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쓰이는 과정이었다”는 말처럼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고 삶의 지평을 넓혀나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책』은 글을 읽다가 문득 잊었던 기억들이 떠올라 책장을 덮고 한참을 서성였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책이 친밀한 타인처럼 말을 걸어오고 활자 밖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 경험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책 읽기

『살아가는 책』에서 저자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예기치 못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책상에 앉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모래바람을 맞으며 달을 보았고, 말 울음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오랜 편집자 생활로 진중한 읽기가 몸에 밴 만큼 책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낯선 세계를 기꺼이 헤매고 다니며 타자들과 조우한다. 생경한 삶과 이야기를 제 것처럼 느끼며 익숙한 자신과 조금씩 멀어지기를 시도한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분명히 장소성을 의미해 내가 있는 이곳의 바깥을 탐험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처음 만난 타인들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잠시라도 타인의 심신을 걸쳐볼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잃는 것은 ‘과거의 나’다. 길을 잃으면 나를 잃고 (그런 두려운 처벌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얻는다. 길을 잃으면 들어갔던 입구로 도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구로 빠져나오게 된다. _140쪽

저자는 기존의 ‘나’를 벗어나 새로이 자신을 발명해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 글 속에서 마주치는 인물과 상황에 오래 머물며 섣불리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애쓴다. “좋은 것은 기존의 것이 부서질 때 얻어질 수 있다”는 말을 심도 있는 독서로 실천하는 것이다.

작품과 현실을 잇는 중간자로서의 글쓰기

『살아가는 책』에서 언급되는 책 속 이야기는 저자가 직접 경험했거나 인터뷰를 통해 들었던 사연들을 불러일으킨다. 데버라 리비의 『살림 비용』에서 쉰이 넘는 나이에 결혼을 끝내고 홀로 서기를 시작한 화자를 보며 저자는 이혼한 지인들이 가부장제적 사회에서 겪는 다사다난한 부침을 상기한다.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에서 친족 성폭력에 노출된 아이를 보면서는 “23년간 하루도 예외 없이 지옥에서 살았어요”라고 고백하던 스물네 살의 예원을 떠올린다. 이렇듯 저자는 책을 읽는 도중에 끊임없이 현실의 문제들이 문장 사이로 틈입해오는 경험을 한다. 자신의 고통을 책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처럼, 그들의 생을 경유한 감각으로 섬세한 문장들을 써 내려간다.

나는 오랫동안 읽기만 하던 독자에서 최근 쓰는 쪽으로 조금씩 건너왔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허물어뜨렸다가 재구축하는 과정이다. 허물다 보면 스스로가 한심해지지만, 구축하다 보면 못생기고 헐거운 자신도 견딜 만해진다. (…) 읽는 데서 나아가 필연적으로 나의 삶이 될 글쓰기를 향해 한발 한발 같이 내디뎠으면 좋겠다. _8~9쪽

읽었던 책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결국 먼 곳의 이야기들을 제 안으로 불러들이는 작업일 것이다. 타자와 텍스트로 촘촘히 결속되는 과정이자 잇대어지고 확장되는 체험일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책』은 열성적 읽기와 곡진한 쓰기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책과 더불어 살아갈 때에만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생의 경이로운 장면들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