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세계의 어둠을 어떻게 밝히는가

한국시단의 기둥 나희덕, 상처 입은 세상을 어루만지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완성된 생태와 문명의 시론집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시단의 큰 기둥으로 우뚝 선 나희덕이 시에 대한 철학과 그간의 관심사를 촘촘하게 엮어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를 펴냈다. 1989년 등단 이래 쉼 없이 추구해온 생명·생태·환경 등의 시적 주제가 유려하고도 날카로운 언어로 가득 차 있다. 나희덕은 시인으로서의 작품활동은 물론이고 깊이 있는 비평문과 마음을 보듬는 산문으로도 정평이 난바, 이번 시론집은 평론가로서 또한 에세이스트로서 활발히 활동해온 또 하나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발표한 글들을 벼리고 선별한 다음 일관된 주제와 일정한 호흡으로 치밀하게 구성해낸 덕분에, 에세이처럼 쉽고 흥미롭게 읽히면서도 저자의 문장과 주제의식이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는 것이 특장점이다.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창비 2003) 이후 이번 시론집을 묶어내는 데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것은 저자가 얼마나 꼼꼼하게 글들을 직조해냈는지를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상기후와 팬데믹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독자에게 『문명의 바깥으로』는 시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끝까지 시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세계의 어둠을 밝히며 시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지평에 대해 꼿꼿하게 써내려간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여전히 시 읽기가 가치 있으며 또한 즐거운 일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론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문장은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문명의 바깥으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1부는, 자본주의의 말기적 증상과 이로 인한 생태위기의 현실에서 시의 역할을 되짚어보는 글 모음이다. 자본세(Capitalocene)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지금’을 사는 시인들은 어떤 의식을 바탕으로 저항하고 있는지를 톺아보는 작업이 특히 인상적인데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시를 통해 이를 살펴보았다. 강성은, 이장욱, 이근화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추적해본 것도 유의미한데 최근 발표되는 ‘반려동물 시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지금, 저자 스스로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몸과 마음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지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제2부는 작가론들이다. 나희덕의 문학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정현종 김종철 강은교부터 신예인 조온윤 박규현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도 다양한 시인에 대한 글이 모였다. 분석에 치중하는 여느 작가론과는 달리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담담한 사념이 풍성하게 포함되어 있어 마치 각각의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문체가 편안함을 준다. 세상을 떠난 기형도, 박영근, 최영숙에 대한 글은 특히 독자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제3부는 백석, 윤동주, 김수영, 김종삼에 대한 글로 학술적으로도 유의미하며 한국 현대시의 밑바탕을 크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탁월한 글들로 꾸려졌다. 특히 김종삼의 「라산스카」 시편에 대한 비평문은 마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흥미진진한데, ‘라산스카’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폭넓은 문화적 지식을 동원해 추적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백낙청과 김현이 각각 엮은이로 참여한 김수영의 두 선집을 비교분석하는 글 또한 한국시 독자라면 스쳐갈 수 없는 대목인데 엮은이의 문학적 성향이 선집을 어떻게 다채롭게 꾸려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며 김수영이라는 거대한 시인을 더욱 다채롭게 조망하게 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끌어당기는
‘나희덕’이라는 한국시의 중력

나희덕의 20년간 연구·비평·산문의 총체인 『문명의 바깥으로』는 그 시간에 값하게 풍부한 내용으로 가득하나 난해하지 않고, 또한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는 저자 스스로 밝히듯, 저자가 사숙한 많은 스승에게서도 배워온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 덕분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나희덕의 문학을 직립하게 하는 세개의 중력으로 ‘역사적 인간을 적는 백낙청’ ‘생태적 인간을 적는 김종철’ ‘상상력의 인간을 적는 정현종’을 들며, 이들이 나희덕이라는 촉매를 통해 『문명의 바깥으로』에 조화롭게 용해되어 있다고 했다. 나희덕 스스로 “한국 현대시의 한 중력”(추천사)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번 시론집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이 덕분이다. 저자는 본인의 글이 “성냥팔이 소녀가 필사적으로 그어대던 성냥의 불꽃처럼 이 시대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책머리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시론집을 펴낸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일견 무용해 보이는 시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 수 있다는, 또한 상처 입은 세계를 치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치료약일 수 있다는 저자의 신념에 기반한다. 그 강인한 마음이 오롯하게 문장으로 모인 『문명의 바깥으로』. 이 목소리에 시를 사랑하는 독자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시’라는 유효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은은하게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