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신인소설상 오늘의작가상 수상 작가 정은우의 첫 소설집
상실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따스하고 정갈한 위로

서사적 완결성과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문체로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 제46회 오늘의작가상을 받으며 작가적 입지를 단단히 다진 소설가 정은우의 첫 소설집 『묘비 세우기』가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꾸준히 쌓아온 내공으로 엮은 여덟편의 작품이 실린 이번 소설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연인이나 친구를 잃은 인물들과 나이 듦에 따라 오래 함께한 배우자를 떠나보낸 인물, 어느 날 홀연 사라져버린 룸메이트를 되찾고자 하는 인물까지, 정은우는 깊은 애정과 우정을 나누던 존재를 잃고 혼자 남아 상실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을 단정하고 따뜻한 호흡으로 그려낸다. “단순한 생계로 치부될 수 없는 존엄하고 귀한 삶의 세부를 바라보는 애정적이고 견고한” 이야기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죽음과 애도, 삶의 지속 가능성”(등단작 심사평)이라는 생의 본질적인 문제들까지 세심하고 살뜰히 살피는 이번 소설집은 그 등장만으로도 든든하고 따스한 위로로 다가온다.

계속 사랑하고 계속 기억하기 위해
잘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묘비 세우기』 속 등장인물들은 무언가를 잃는다. 동거하던 연인을 갑작스러운 추락 사고로 잃거나(「묘비 세우기」) 오랜 시간 함께 지냈던 배우자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헤어진 약혼자의 사망 소식을 듣기도 한다(「이지의 다카코」). 아주 가깝다고 생각했던 룸메이트가 어느 날 홀연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하면(「하비의 책」) 친했던 친구를 한순간의 선택으로 직장에서 내쫓게 되기도 하고(「피존」) 같은 병을 앓으며 친밀해진 친구의 장례식에 가게 되기도 한다(「캐리어」).
그러나 정은우의 인물들은 함부로 슬픔을 토해내지 않는다. ‘비밀’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깊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보낸 것들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묘비 세우기」의 재언은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하던 중 리프트에 올랐다가 추락하는 변을 당한다. 사실혼 관계였던 연주에게는 그를 제대로 애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둘만의 ‘호사’는 신상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재언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냉동 탑차에 갇히는 꿈을 계속 꾼다고, 아이스크림은 물론 차가운 음식을 먹기 어렵겠다고 말한다. 연주는 홀로 컵 아이스크림을 먹고 재언의 몫으로 반을 남겨두곤 그 사이에 새 플라스틱 숟가락을 꽂아둔다. 재언은 그런 연주를 보며 ‘묘비를 세운다’고 장난스레 말한다. 재언의 빈자리에는 아이스크림 묘비들만이 남아 있다. 연주는 아이스크림을 녹여 묘비를 허문다. 허공에 대고 재언의 옷을 입어도 좋을지 물으며 자신 앞에 놓인 삶의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지의 다카코」의 다카코 역시 한평생 의지하던 배우자인 미노루의 죽음 앞에 의연해 보이는 자세를 취한다. 피난으로 떠나온 뒤로 다시 가지 않았던 제주에 가 바다를 바라보거나 짧게 기도하는 것으로 그를 배웅한다. 「캐리어」의 지언은 환우였던 경주의 장례식에 가던 길, 돌연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모아둔 조위금 봉투를 모두 털어 캐리어를 구매하고 평소 입지 않던 밝은 색의 옷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질환의 특성상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음식도 까다롭게 가려 먹던 지언은, 늘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던 경주를 기리며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버린다.

깊은 묵시 속에서
존엄하게 기록되는 삶

가까운 이들의 죽음 앞에 언뜻 초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은우의 인물들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어쩐지 블랙박스나 CCTV를 보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정은우는 지독한 슬픔 속에서도 마음을 감추고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슬픔”을 세밀하고 따스하게 “재생”(소유정 해설)시킨다. 상실 이후에도 다시 생활로 돌아가 떠난 이의 자리를 정리하고 메우며 하루하루 다르게 다가올 슬픔의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사람들의 ‘현재진행형인 슬픔’을 그려낸다. 생활 곳곳에 스며 있어 눈물이나 통곡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의 얼굴을 묘사하는 정은우의 이야기들은 그 어떠한 위로보다도 진하게 다가온다. 살아가다보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슬픔의 모양새를 기꺼이 응시하며 탄탄하게 직조하여 끝내 “존엄하고 귀한 삶”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시작이 반갑고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