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의 시인 성동혁, 5년 만의 신작시집
투명한 서정의 시인 성동혁이 불투명한 여러 색을 거느린 회의와 성찰의 시인으로 우리 앞에 왔다. 어린 사도라 불리던 그가 사랑으로, 숭고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감싸던 순정한 모습에서 벗어나, 어둡고 혼란스런 세상에서 숱한 인간적인 문제들을 겪으며, 타인의 민낯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민낯까지 가없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시로 써낸다. 더 이상 투명하지 않은 검정색으로.

발만큼이나 멀리 있는 모스크바를 향해
항상 차에 산소탱크를 싣고 다니는 시인이, 한겨울에는 집 밖으로 나오기 힘든 시인이 모스끄바라니. 시인에게는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시인은 육체를 가장 고통스러운 풍경 속에 위치시키고 나서야 영혼을 건질 수 있다고 믿었나 보다. 결국 시인은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리고 말한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가벼운 육체이며, 어쩌다 이렇게 어지러운 걸까요. 최고 성직자여, 차라리 이럴 거면 그저 ‘흩어지게 하소서’.
‘지상을 통째로 화장하는 거대한 정원사처럼/ 달을 태우며 걸어가는 가을처럼’ 멈추지 않고 이동하며, ‘물병에 넣어 둔 천사의 고막처럼’ ‘듣지 않고도 먹먹하게 울어’ 본다는 게 뭔지 「발문」을 쓴 임승유 시인은 알고 싶었다.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시 「Овца」을 읽으며 임 시인은 마침내 알게 된다. 모스끄바에 도달한 시인의 육체가 그 육체를 통과한 목소리를 통해 ‘중력’을 벗어나 아름답게 흩어지고 있다는 것을.

슬픔이 뭔지 알아 슬픔을 그냥 둘 수 없는 시인
다시, 「발문」을 쓴 임승유 시인은, ‘아네모네’는 탁자 위 화병에서가 아니라 장화를 신고 나선 ‘가을’ ‘산책’길에서 떠올린 꽃, 혹은 ‘별’과 ‘남동풍’과 ‘식욕’의 분별이 따로 없는 신화적 세계의 ‘목동’이 지키는 거대한 ‘화병’에 담긴 ‘꽃’으로 보았다. 임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장화를 신고 산책을 나선, 내친 김에 광야로 내달리는 ‘목동’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고 고백한다. 「니겔라」를 읽다가는 “율법처럼 울타리를 펼치고 모든 슬픔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몰고 있”는, 시인이 아는 또 다른 시인 동혁―슬픔이 뭔지 알아 슬픔을 그냥 둘 수 없는, 유쾌한―을 떠올린다. 이 이상하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시, 「니겔라」에서 속죄양이 되어 황야를 도망쳐 다니는 게 아니라, 언제고 울타리를 지키며 슬픔을 조율하는 목동으로서의 동혁을.

(독자들과) 함께 표제시 「아네모네」를 읽다
나 할 수 있는 산책 당신과 모두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라늄은 원소기호가 아니죠
꽃 몇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 잘리면 그냥 가자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우린 플로리스트 플로리스트라고 하지요
꽃범의 꼬리 매발톱
모종의 식물들은 죽은 동물들이 기어코 다시 태어난 거죠
거기 빗물에 장화를 씻는 사람아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건조하고 낮은 짐승이 불시에 떨어지는 것 같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
그래도 시월에 당신에게 읽어 준 꽃들의 꽃말은
내 편지 다름 아니죠
붉은 제라늄 내 엉망인 심장
포개어진 붉은 장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나 지옥에서 빌려 온 묘목 아니죠

‘봄날의책 한국시인선’의 첫번째 시집
봄날의책은 울라브 하우게의 시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부터 사이토 마리코, 이바라기 노리코, 라이너 쿤체의 시집, 그리고 캐롤 앤 더피의 『세상의 아내』까지 모두 다섯 권의 ‘세계시인선’을 냈다. 동시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시적 흐름, 지향 등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싶었다. 당연히, 그 시집들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시에 도움이, 자극이 되었으면 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국시인선’은 한국시의 새로운 흐름, 지향을 최선을 다해 담아내고 싶었다. 그 첫 시집으로 시인 성동혁의 『아네모네』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