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았던 책을 다시 펼치다
오래 사귀던 남자친구가 노래방 도우미와 바람이 났다.
그 충격에 한 달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
그 와중에 평생의 짝을 만나 식은 안 올리고 결혼해 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했다.
내가 그린 표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벌어들이는 수입이 달라지자 생활양식이나 소비패턴이 달라졌고, 남편과 함께 여행과 캠핑을 다녔다.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갈 때마다 점점 집은 넓어졌고 채광은 좋아졌다. 때깔 좋은 경험을 차곡차곡 쌓기는 했지만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듯 살았다.
……
그리고 난 잠시 손에서 놓았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래, ‘나’는 내가 읽은 ‘책’이며 내가 그린 ‘그림’이다.

내가 읽은 첫 책
태어나 내가 읽은 첫 번째 책은 뭐였을까? 엄마나 아빠가 사준 책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내가 직접 고른 책일 수도 있다. 그래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그림책이 있는데 아무리 검색해봐도 찾을 수 없던 그 책을 일본 소도시 어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들어선 지 2분도 지나지 않아 책 한 권이 눈에 탁 걸려들었다. 히라타 쇼고의 『엄지공주』가 바닥에 수북이 쌓인 책더미 맨 위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맙소사. 당장 손을 뻗었다.

어른이 되어 알게 된 내 취향의 원형
사춘기 시절, 도서관을 드나들며 많은 책을 읽었지만 해리 포터나 앤 시리즈, 『비밀의 화원』을 유독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이입했기 때문이리라. 어른이 돼서 세 권의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바로 주인공 셋 다 고아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거나 성장에 방해되는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이 있는 자연이 가득한 새로운 세상으로 이주한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이전에 없던 경험을 하고 부모님은 아니지만 세상을 알려주는 어른과 새 친구를 만나 성장한다.

수십 가지 질문에 갇혔을 때 나를 구원해준 책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저자가 성인이 되어 그림을 시작할 때 드로잉을 어떻게 시작하면 되는지, 그리다가 다들 어디에서 막히는지, 빈 종이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지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데 드는 수십 가지 질문을 책으로 배우고 채웠다. 누구의 어떤 책을 읽으며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다잡았는지 반지수가 읽은 책을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