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삶이란 얼마나 고독한가요” 
세상 모든 이름 없는 것들에 몸짓을 건넸던 피나 바우쉬와
세상 모든 몸짓에 이름을 붙이는 시인 안희연의 만남

“섬세하면서 다정한 안희연의 문장들은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중력을 거스르려 애쓰는 무용수의 외로움과
리듬에 자유롭게 몸을 맡기는 어린아이의 해맑음을 공평히 어루만진다.”
_백수린·소설가

어떤 춤들은 사랑처럼“와락”다가온다 

독일의 전설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와, 찬란한 언어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시인 안희연이 만났다. 알마의 신간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는 피나 바우쉬의 혁명적인 예술 세계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젊은 시인의 시선을 통과하며 어떤 사유와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지 보여주는 에세이다. 피나의 무대는 파격과 실험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안희연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잃지 않았던 한 ‘거장’의 태도에 골몰한다. <카페 뮐러> <콘탁트호프>와 같은 피나의 대표작들은 시인의 사랑, 기억, 일, 관계, 계절, 삶과 죽음에 대한 일상의 기록에 켜켜이 녹아든다. 
안희연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언어 이전에 춤이 있고, 춤 이전에 고통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말이 되지 못한 고통은 춤이 된다. 고통의 자리에는 다른 것들이 놓일 수도 있다. 말이 되지 못하는 슬픔, 말이 되지 못하는 기억, 말이 되지 못하는 사랑 같은 것들은, 이윽고 춤이 된다. 여기서 춤은 사전적인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인의 어깨, 홀로 늦은 저녁을 해결하려고 만두를 포장해가는 남자의 검은 비닐봉지, 이별하고 상실한 사람들의 텅 빈 눈동자… 이 모든 것이 춤이라고, 안희연은 말한다.
그런 안희연에게 이 책이 던져준 얄궂은 운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 모든 춤에 대하여 다시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인은 이 요원한 일에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비밀스러운 다락의 문”을 여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 문이 열리자마자 피나는 시인에게 와락 쏟아져버린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예술인, 일러스트레이터 윤예지는 자신에게 피나가 당도했던 순간을 열여덟 컷의 그림으로 붙잡았다. 피나가 몸의 언어로 뛰어넘으려 했던 말의 한계는 윤예지의 강렬하고 서정적인 그림들을 통해 다시 한번 극복된다.

피나 바우쉬 타계 10년, 
그녀의 외투가 먼저 돌아와 있는 방에서
글과 그림으로 공명하는 두 예술가

예술가가 세상을 떠나도, 남아 있는 이들에 의해 다시 창조되는 예술의 무한함을 이 책은 돌아보게 한다. 적어도 예술가의 죽음은 그런 뜻에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이 아니라 없음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당신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요. 무용수의 발을 감싸 안아주는 신발일 수도, 텅 빈 공연장을 지키는 의자일 수도 있겠군요. 스스로 신이 되어 한 세계를 축조해가는 재미에 빠져 있을까요, 아니면 신이 만든 세계에 갇혀 불안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을까요. 어느 쪽이든 당신은 여전히 질문하는 사람이겠지요. 논리로 가닿을 수 없는 거리를 마음으로 성큼성큼 내딛으며 가고 있겠지요.”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죽음은 “외투를 벗듯 몸을 벗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일”이다. 그리고 피나의 죽음은 “당신의 외투가 당신보다 먼저 돌아와 있다는 것만 빼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일이기도 하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춤췄던 피나 바우쉬,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단어를 건네는 시인 안희연,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색을 입히는 일러스트레이터 윤예지는 그렇게 한자리에서 공명했다. 그 결과물이 피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는 2019년 6월 30일,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라는 책으로 나왔다. 그리고 초여름의 축제처럼, 예술의 한계를 의심한 적 없는 독자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공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피나가 열어 바닥까지 휘저은 시인의 마음 
고독 속에서 빛을 더듬으며 쓴 절절한 연서

소설가 백수린은 이 책을 두고 “피나 바우쉬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자 불가해한 아름다움에게 바치는 젊은 시인의 절절한 연서”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 책에는 피나를 수신자로 하는 편지 형식의 글이 중간중간 놓여 있다. 안희연은 편지를 통해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에 도사린 불안, 서울이라는 화려한 도시가 요청하는 고독, 예술가가 세상을 떠나도 작품은 그대로 남는다는 사실의 경이와 두려움을 고백한다. 이 편지들은 정중하되 솔직하고, 지극하되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세상에 오가는 모든 다른 연서들처럼. 답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만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라면 동시에, 피나 바우쉬의 단호하고도 섬세한 답장이 함께 읽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예술로 열려 바닥까지 휘저어진 마음이 무언지 이해하고, 나만의 ‘카페 뮐러’를 짓고 부수어본 독자라면 말이다. 

*‘Pina Bausch’는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이 규정하는 ‘피나 바우슈’ 대신, 국내에 알려진 통상의 관습에 따라 ‘피나 바우쉬’로 표기했다.